생각해보니 이번 여행 중
캄보디아에 가장 기대가 컸던 것도 같다.
프놈펜에 도착해서 첫 날.
여긴 꼭 봐야지라고 벼르고 있었던
동양의 아우슈비츠 킬링필드 유적지로.
유적지란 말을 붙이는 것 자체가 정말 잔인하다.
킬링필드는 캄보디아 독재 시기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즈 정권이
정권의 정당화를 위해 수백만의 사람들을 죽였던 곳이다.
캄보디아 각지에 유적지가 있지만 가장 유명한 곳은
프놈펜 남쪽의 쯩에익 기념관(사람들을 죽인 곳)과
프놈펜 시내의 뚜어슬랭 박물관(사람들을 고문한 곳)이다.
보통 뚝뚝 기사들이 이 두 가지를 묶어서 패키지로 데려다준다. 20불 정도.
마스크 필수. 가는 길에 먼지 개 쩐다. 안되면 손수건이라도.
나 뿐만 아니라 많은 외국인들이 이 곳을 보러 왔다.
입장료가 10불이었나. 5불 더 주면 설명이 들어있는 녹음 테입을 빌려주는데
한국어도 있다. 그래서 5불 더 주고 빌렸다.
가슴 아픈 역사는 제대로 잘 알아야 반복되지 않는다.
추산에 따라 다르지만, 크메르 루즈 시기 독재 정권에 의해
적게는 30만에서 많게는 140만의 사람들이 살해당했다.
단순히 많이 배운 부르조아라는 이유로.(많이 배운다고 돈 많은 것도 아닌데!)
손에 굳은 살이 없어서, 안경을 껴서, 그런 부모에게서 태어나서.
수십만의 사람들이 총알이 아깝다는 이유로 죽창에 찔려 죽거나
심하게는 머리에 비닐봉지가 씌워져 질식사당했다
(이걸 배경으로 만든 영화 '킬링필드' 강추.)
그리고 폴 포트는 80세까지 장수하다 암으로 죽었다. ㄱ ㅅ ㄲ....
4층 높이 규모의 기념탑.
안에는 발굴된 사람들의 유골이 전시되어 있다.
촬영이 금지는 아니지만, 망자들에게 예의를 위해서 난 찍지 않았다.
저기 있는 해골 하나하나가 전부 누군가의 아들이고 딸이었다.
이름도 모르는 채 번호로 표시되어 있는 사람들.
4층짜리 첨탑에 자리가 없어 이제는 순번대로 해골을 빼내어 장례 처리를 한다고 한다.
아직도 비가 오면 유골이 나오는 자리.
안내 멘트는 꾸준히 유골이나 이빨 조각을 보면 절대로 건드리지 말고
관리자를 불러달라고 말한다.
지금 캄보디아 정부 능력으로는 140만구에 달하는 시신을 꺼낼 능력이 없다.
킬링필드 집단 매장지는 전국에 흩어져 있다.
사람들이 추모의 의미로 걸어놓은 팔찌들.
해롤드는 여기가 Interesting 하다고 했는데.
이건 그냥 흥미를 가지고 구경할 만한 곳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은 시내에 있는 고문지에서 고문을 당하다가
눈이 가리워진 채 풀려나는 줄 알고 이리로 끌려 와서 죽었다.
죽일 때에는 주변 농장에 비명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음악을 크게 틀어두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죽어갈 때 마지막으로 들은 소리는 큰 음악 소리였단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가슴 아픈 곳, '킬링트리'
3세 미만의 아이들의 다리를 잡고 나무에 후드려 쳐서 죽인 곳이다.
크메르 루즈 정권이 붕괴되고 사람들이 이 사형장으로 처음 들어왔을 때,
이 나무에는 아직도 아이들의 두개골 조각과 뇌수가 묻어 있었다고 한다.
단순히 엄마가 안경을 써서, 그런 엄마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잡혀와서 죽은 아이들이다.
밑에 유골이 아직 있으니 들어가지 말라는 표시.
한 구덩이에 100명을 묻었다고 했을 때 내가 오늘 본 곳만 10곳이 넘으니
지금 내 발 밑으로 천 명의 영혼이 이유도 모른채 죽었다는 거다.
사람이 사람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가슴이 먹먹해져 나아서 뚝뚝이를 바라봄.
사실 저 노란색 뚝뚝이가 타고 싶었지만.
콜택시도 아니고 뚝뚝이 색깔을 마음대로 고를 수 있나.
이제는 더더욱 숨 막히는 뚜어슬랭 박물관으로.
기존에는 학교였던 곳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세뇌하고
그렇게 세뇌된 15-18살 짜리 아이들은 나가서 지식인들을 사냥했다.
6명 정도 백인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환경은 열악하기 그지 없었고
정권 붕괴 이후 여기를 지나간 사람들 중
제 발로 걸어나간 사람은 채 10명이 되지 않는다.
크게 웃지 말라는 경고문.
하지만 사실은 나오던 웃음도 싹 들어가는 곳이다.
120만명이 여기서 고문당하고,
고문했던 사람들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었다.
정치학을 공부하면 가끔 이렇게 오싹한 순간이 있다.
120만명이 아무렇지 않아 보이지만 그 중 한명이라도 내 지인이 섞여 있다면.
이건 숫자가 아니라 사람이다.
건물은 3개 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여기서에 발굴해 낸 옷가지와 사진, 서류 등이 전시되어 있다.
먹을 것은 부족했고 철봉, 기숙사 침대, 교실 의자 등
학교의 모든 물품이 고문 용품으로 둔갑해 사용되었다.
문이 열리던 날, 사람들 눈에 가장 먼저 띄인 것은
침대에 눕혀져 고문 당한 채 죽어 있었던 시신이었더랜다.
이들이 사람들을 고문하고 사냥했던 속칭 홍위군들이다.
공산주의 독재는 어디나 똑같은 수순을 거친다.
세뇌하기 좋은 아이들을 골라서 공산주의자로 교육한 뒤,
이미 사라져버린 귀족 부르조아를 대신하여 지식인과 사업가 계층을 사냥한다.
독재를 위해서는 분노할 상대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광기는 한번 시작되면 무섭게 번져나간다.
사망한 사람들의 사진.
목 뒤에는 받침대를 세워 사진 찍기 좋게 묶어놓았다.
노인과 성인도 있지만 물론 아이들도 있다.
이들 역시 누군가의 가족이고 친구였는데.
정작 독재자 당사자는 UN회의에 캄보디아 지도자로서 호출되었다니.
크메르 루즈 정권이 무너진 건 폴 포트가 노환으로 자리에 눕고 나서였다.
천벌이 있다면 그런 놈이 그렇게 속 편하게 죽으면 안되지.
과거 이 자리에는 해골로 만들어진 캄보디아 지도가 있었으나
인권 유린이라는 비판에 시달려 2005년에 해체하고 사진만 남아 있다.
이 박물관은 정말 지금 사진으로 봐도 한숨이 나온다.
누군가 캄보디아에 간다면 추천은 하겠지만 두 번이나 가고 싶지는 않다.
누군가에게 추천하는 이유는 이런 역사 역시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생존자 12명중 한 명인 할아버지.
뚜어슬랭 박물관의 정건 당시 이름은 S-21
아내분과 같이 잡혀와 아내분은 여기서 사망했음.
국가에서 보상은 개뿔.
박물관에서 책을 팔아 10달러 받고 생계를 유지하는 게 이 분의 일이다.
이 분이 겪은 일이 어찌 같이 기념사진을 찍을만한 일인가.
시내에서 뚝뚝이를 보내고 마사지를 받고
미얀마에서 인력거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있지만
그래도 얘는 정말타고 싶었다
묵었던 호텔 지배인한테 부탁해서 찍은 사진.
마사지와 함께 오늘의 우울한 기분도 날려버리자.
그리고 2013년 CITYNET 활동할 때 만났던
캄보디아 친구 몰리나와 조인.
내 호텔까지 데리러오고 데려다주고 밥도 사주심 ㅠㅠ
서강대학교에서 신문방송학 석사과정을 마친 뒤
지금은 캄보디아 NGO에 취직해서 아동 도서를 만들고
이동도서관을 운영하는 일을 하고 있다.
2년만에 만난 거다. 시간 참 빨라.
캄보디아 식당에 가서 식사.
뭐가 뭔지 모르니 얘가 주문해주는 걸로 걍 먹었는데
맛있었음. 역시 본토 식당은 본토인과 가야 해.
한국에서의 생활이 어땠고 CITYNET 멤버들은 어찌 지내고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고 이런걸로 이야기꽃을 피웠음.
우리 둘, 꼭 둘 다 꿈을 이루자.
캄보디아에서의 마지막 밤이 이렇게 지나가고.
내일, 마지막 목적지 말레이시아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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